대한민국/강원도

홍천 수타사, 괘석리 사사자 삼층 석탑,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

如一 2022. 5. 9. 16:06

如一同行 서른 여덟번째 - 홍천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 석탑,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 홍천 수타사 동종

 

홍천으로 여행을 떠나본다원주를 지나 홍천의 보물인 탑들을 찾아 나선다.

 

 

 

두탑의 명칭은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과 홍천 희망리 삼층 석탑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지명이 다른 곳의 두탑이 지금은 옛자리가 아닌 구 홍천 군청 자리인 홍천 미술관 건물앞에 자리하고 있다.

 

두탑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것도 큰 행운이라 생각 하나 한편으로는 원래 터에 자리 못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모습이 남다른 사사자 삼층 석탑을 먼저 찾아본다.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으로현재의 자리인 홍천 군청 안으로 옮겨 세웠다탑이 서 있던 원래의 위치는 일대가 절터였을 것이나지금은 밭으로 변하고 주변에는 기와조각들만이 흩어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4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4사자탑(四獅子塔)이라 부르고 있다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는데그 안에 꽃무늬조각이 장식되어 있어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위층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1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는데이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어원래는 이곳에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새겼고가파른 경사면 탓인지 얇고 밋밋하다네 귀퉁이는 살짝 젖혀져 뾰족하다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고닳은 흔적이 보이나 대체로 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돌사자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을 물씬 풍기고 있다각 재료의 구성이 통일신라의 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지만 고려시대 중기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희망리 삼층석탑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갖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3층석탑으로원래는 홍천초등학교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군청으로 옮겨 놓았다보수를 하여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이미 지붕돌은 깨어졌다.

 

널찍한 돌 2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는 상태이다기단 가운뎃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두었다기단을 마감하는 맨 윗돌은 윗면에 약간의 경사가 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안타까운 것은 3층의 몸돌이 없어져 위층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지붕돌 밑에는 모두 4단씩의 받침을 새겼다지붕돌이 두껍지는 않지만네 귀퉁이 끝부분의 치켜올림이 적어서 날렵한 느낌은 없다.

 

각 부의 조각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멀지 않은 곳에 보물인 희망리 당간 지주가 존재한다이곳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주변 발견되는 기와조각이 절터임을 짐작하게 하는 데 탑이 발견된 홍천 초등학교와는 좀 떨어지 곳이라 놓치고 수타사로 향한다.

 

수타사 입구계곡 

 

주차장부터의 수타사로 향하는 곳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잘 정비된 5분 정도의 길을 들어 서니 이전의 계곡도 녹음 때문인지 멀리 물러난 듯하고.다소 생소한 느낌이 든다 산천과 건물은 다소 변했는 데 나의 기억이 그것을 재현 못하는 듯 하다. 

수타사는 708년 (성덕왕 7)우적산 아래에 일월사로 처음 지어진 것을 1569(선조 2현재의 위치인 공작산으로 옯기고 이름을 바꿨다 한다임진왜란으로 절이 완전히 불타버리고 40여년간 폐허로 있다가 1636년 공잠대사가 대적광전을 짓고 그후 1683년 까지 여러 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공사중인 봉황문을 소조 사천왕상이 들어서니 소조 불상이 자리한다.

 

 

소조불상 

 

이곳을 통과하니 우주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인 소조 사천왕상이 자리한다이들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제석천의 면을 받아 수미산 중턱에 4(동서남북)를 다스리는 왕인데 아래로 팔부중을 거느리며 4주를 수호한다.

소조사천왕은 나무로 심을 만들어 새끼 줄로 감고그위에 진흙을 발라 형태를 만들고 채색한 것이다머리뒤쪽의 불꽃보양이나손에 들고 있는 각종 물건등은 부분적으로 나무를 사용하였다. 크기는 3m가 넘으며 수타사 연역을 적은 수타사 사적기에 강희 15년에 사천왕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1676년 (숙종2)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수타사 동종

 

봉황문을 지나면 왼편에  전각이 보이는데 이곳이 우리의 다음 여행 목적지라 할 수 있는 보물 수타사 동종이다.

몸통 밑부분애 1670년 (현종 11)에 만들었음을 알리는 문구가 있고, 종의 몸통 윗부분에는 인도의 옛 글자인 범자를 새겼다.  그 아래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4개 있는데 마치 불곷같이 화려한 모양이다다른 종들은 몸통과 종을 거는 고리 부분을 한꺼번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이 종은 따로 만들어 붙이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 제11-2)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주변에 굴곡진 화문을 첨가한 독특한 당좌로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김룡사 동종이 만들어진 1670년에 그 보다 3개월 뒤에 만들어진 종임을 알 수 있다.

 

 수타사 홍회루

 

봉황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수타사 홍회루를 맞게 된다

이곳은 효종 9년에 건립된 누각형식의 건물이다. 정면 5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주심포식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이다이 홍회루는 대적광전과 마주보며 개방 되어 있어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 기능 및 수륙재와 같은 대형 불교의식을 거행 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사찰의 중심공간으로 들어갈떼 ” 아래로 드나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물은 단층으로 되어 옆으로 돌아가는 진입 방식이 독특하다.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수타사의 중심 법당으로앞면과 옆면이 3칸 규모이다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간직한 공포의 모습과조선 후기의 모습을 보이는 내부 살미 첨자의 판재화연봉 장식등이 함게 나타나고 있다.

수타사 대적광전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기단지붕모체 등이 균형이 잘 잡혀있는 조선 후기 불전건물로 평가받고 있다용마루 한가운데 청기와 2개를 올려 놓았다.

수타사의 동종과 미술관 앞 두탑을 답사 하고 물걸리로 향한다. 볼적 마다 달라지는 환경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예전의 고색창연하고 조용한 인적 드문 사찰과 문화유적지는 정말 관람 하기 좋게 많이 달라 졌다. 여유롭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모습만큼 우리 문화재도 그에 걸맞게 단장 된 옷으로 갈아 입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