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一同行 서른 아홉번째 - 홍천(2)
물걸리 사지
수타사에서 내촌면으로 길을 나서면 물걸리 사지가 있다.
이곳 물걸리 사지에는 많은 보불이 존재한다. 내촌면으로 피서 오는 사람은 많지만 이곳에 보물이 다섯개나 존재하는 지는 잘 모르고 있다. 이름난 수타사 가 가지고 있는 월인석보와 동종이 보물 2종이지만 수타사 절 보다도 물걸리 절터의 전각안에는 4 가지의 보물과 하나의 삼층 석탑이 존재 한다는 것은 이곳에 큰 사찰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마을의 한부분이라 사지 바로 옆에 농가가 있다. 큰길에서 들어서는 길은 소로 이고, 입구에 차를 주차할 곳도 없는 곳으로 이어서, 차로 여행시는 마을 입구에 주차후 걸어서 방문 하기를 권한다.
이곳의 많은 석물을 통하여 이곳에 큰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 앞에 내촌천이 흐르고 사지의 뒤편은 산이 아닌 구릉처럼 낮으막하다. 이전의 사찰은 어떠 하였는지 무척 궁금하게 하는 곳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은 흥양사터라고 한다. 그에 대하여 더 공부할 능력이 없음을 탓해본다. 지금은 입구에 대승사라는 절이 새로이 자리한다. 삼층 석탑은 제자리에 존재하고, 뒤편에 전각을 지어 보물 의 석보불, 석조 광대등을 보관하였다. 1967년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 입상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등이 발견 된다. 이로미루어 보면 통일신라시대 부터 조선시대 까지 절이 유지 되었을 알수 있다. 절터에는 보물이 5접이 보관 되어 강원도에서는 보물이 가장 많은 유적지 이다. 이곳에는 절터에서 주춧돌, 장대석 불상대좌등의 석재들을 모아 놓았다.

물걸리 삼층석탑
물걸리 절터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다 . 절터에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이전에는 이곳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 (基壇 ) 위에 3층의 탑신 (塔身 )을 올려 세운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2 층은 5 이나 ,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 모서리선이 뚜렷하여 끄트머리에서의 들림도 날카롭다 .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는 노반 (露盤 )만 남아있다 .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탑이나, 기단 각 면의 가운데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것이라든지, 3층에서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 아래층과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한 점 등으로 보아 시대가 조금 떨어지는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1982년 보로각을 짓고 전각안에는 보물 4점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좌로부터 석조대좌및 광배,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석조대좌 이다.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대승사에 있는 것으로 , 불상은 없고 광배와 대좌만 남아 있다.
완전한 배 (舟 ) 모양의 광배는 가운데에 연꽃무늬와 덩쿨무늬가 새겨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모양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윗부분과 좌우 등 9 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각기 손모양을 달리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광배를 받치고 있는 대좌 (臺座 )는 3 단으로 구성된 8 각 모양이다 . 맨 아래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각 면에 새겨져 있고 , 모서리에는 작은 귀꽃이 있다. 중간의 각 면에는 불상과 악귀를 쫓아준다는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대좌의 맨 윗부분은 연꽃이 활짝 핀 반원형 모양이고 연꽃 안에 작은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광배 및 대좌의 양식이 9 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것들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소재의 대승사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부표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것 같으며 ,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 (육계 )는 표현이 분명하지 않다.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모양의 매듭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껍고 투박하게 보이고, 상체는 8 세기 불상에 비해 평판적이고 왜소한 편이어서 당당한 양감이 사라져버린 모습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 (臺座 )는 상 ·중 ·하대로 구분된 8 각형으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8 각의 각 면에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파손으로 인해 신체표현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장식성이 강조되는 9 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대좌 양식을 보여주고 작품이다.

석조 비로 자나불좌상
대승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외에도 석조여래좌상, 불대좌 및 광배 4 기가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게 솟아 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얼굴은 풍만하지만 턱이 뾰족하여 단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긴장감이나 탄력적인 모습이 사라진 채 다소 투박하고 무겁게 늘어진 모습이 역력하다. 옷주름은 어깨에서 두 팔을 거쳐 무릎에까지 나타나 있으나 평행선으로 되어 약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모양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불좌상이 앉아있는 대좌 (臺座 )는 8 각 연화대좌로 상대 ·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에는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향로 등이 새겨져 있다.
8 세기 불상에 비해 양감이 없는 평판적인 신체, 긴장감이 사라진 무겁고 해이한 옷주름 등으로 보아 9 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물걸리 석조대좌
대승사에 있는 이 불대좌 (佛臺座 )는 불상은 없어지고 광배 (光背 )와 대좌 (臺座 )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대좌는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구분이 뚜렷한데 현재 머리광배 부분은 없어졌으며, 안쪽에는 덩쿨무늬를,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표현하였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 각형 대좌로 상 ·중 ·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에는 향로와 새 모양의 조각이 있는 8 각의 받침돌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석이 놓여 있다. 중대에는 8 개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기고, 그 안쪽에 머리광배를 갖춘 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을 이루고 있는 상대는 연화좌로 3 중의 연꽃이 조각되었는데, 연꽃잎 안에 다시 꽃무늬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세련된 이 불대좌는 물걸리에 보존되어 있는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등과 같은 절터에서 발견된 점과 조각수법 등에서 볼 때 다른 불상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의 문화재는 임진왜란 그리고 한국 전쟁 기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하여 목조 건물등은 많은 것이 소실되었지만, 그래도 우리곁에 석물이 남아 있어 그나마 역사속의 실체로 우리에게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을 보며, 석조로 만들어진 보물을 보다 귀하게 여기며 잘 보관하여야 겠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는 많은 사람의 발걸음 속에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헤 본다. 물걸리 사지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속의 보물이 여러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맘으로 오늘의 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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