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강원도

원주 흥법사지, 흥법사지 3층석탑, 진 공대사탑, 진공대사 탑비, 영거화상탑

如一 2022. 3. 2. 13:42
如一同行 스물두번째 - 원주(3)

흥법사지, 흥법사지 3층석탑, 진 공대사탑, 진공대사 탑비, 영거화상탑

如一 유광하 기자등록 2021.06.21 22:30
 

 


 

생각해보니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처음와 본 것 같다. 이 당시는 디지탈 카메라가 없던 시기라 흔적은 어딘가 사진으로 현상되어 흔적이 남아 있으려는지, 당시도 동네의 낮은 고개 넘다가 보았다는 기억으로, 밭가운데 자리한 비신이 없이 흩어진 모습으로 있던 모습에서 정비된 모습으로 그대로 흥법사지의 진공대사비는 그 곳에 자리하고 있다. 길과 집터등 주변모습은  바뀌어도 산의 윤곽과 들어오는 입구의 유곽은 기억 그대로 이다. 오히려 주변이 정비되어서 인지 이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가지런히 정렬되고 주변이 정비되어서 가 아닌가 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흥법사지(興法寺址)는 고려시대의 절터로 1984년에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45호로 지정된다. 흥법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신라 때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이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과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고 농지로 활용되어 절이 어느정도 큰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지금 이곳 사지엔 주변의 집과 농경지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넓은 면적에 탑신 없는 탑비와 삼층석탑만이 덩그러니 자리한다.

 

 

△ 흥법사지삼층석탑

 

보물 464호인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흥법사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 진공대사탑비 

 


 


 

보물 제 463호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는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탑비주변의 석물

 

진공대사의 탑은 어디 있는가 궁금하여 추적해 본다.  지금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고,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보물 제 365호 진공대사탑 및 석관과 국보 제 104 호 염거화상탑이 궁금하여 국가 문화유산 포털을 통하여 그모습을 알아보면

 

 

△ 진공대사탑 및 석관

 

진공대사탑및 석관 (국립중앙박물관 : 국가 문화유산 포털)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신덕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보물 제 365호 진공대사탑 및 석관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 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 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 모양의 머리 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한편 탑의 왼쪽에 따로 놓여 있는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 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지붕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듯한 뚜껑 돌과 긴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이 함은 거의 완전하며 온화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으로 추측된다.

 

 

△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국립중앙박물관 : 국가 문화유산 포털)

통일신라 말의 승려 염거화상의 사리탑이다.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선(禪)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체징에게 그 맥을 전하여 터전을 마련한 뒤 문성왕 6년(844)에 입적하였다.

이 탑은 원래 강원도 흥법사터에 서 있었다 하나,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탑이름 앞에 ‘전(傳:∼라 전하다)’자를 붙이게 되었고, 원래 위치에서 서울로 옮겨진 후에도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 옮겨졌다가 경복궁에 세워졌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탑은 아래위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마다 소박한 조각이 멋스럽게 펼쳐져 있다. 밑돌에는 사자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가운데돌에는 움푹 새긴 안상(眼象)안에 향로를 새겨 두었다. 2단으로 마련된 윗돌은 아래단에는 연꽃을 두 줄로 돌려 우아함을 살리고 윗단에는 둥그스름한 안상(眼象) 안에 여러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사리를 모셔둔 탑신(塔身)의 몸돌은 면마다 문짝모양, 4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가며 배치하였는데, 입체감을 잘 살려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당시의 목조건축양식을 특히 잘 따르고 있어서 경사면에 깊게 패인 기왓골, 기와의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모양, 밑면의 서까래표현 등은 거의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탑을 옮기기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제라도 탑신을 재현하여 탑비의 원형을 유지 하였으면 어떨까?  이번 여행을 통하여 우리의 문화재는 어떠한 연유에서든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는 일을 접하게 된다 그것이 반출이든, 보수이던, 보전을 위하든, 자리를 옮긴 것은 제자리에서 보전되었으면 한다. 만약에 원물이 꼭 박물관에서 보전되어야 한다면 동일한 크기 모양의 모조품이라도 세우고 내력을 자세히 알려 주었으면 한다. 많이 보게 되는 자자제나 사찰의 문화재 반환운동을 보며 이제는 우리도 문화재를 많이 아끼고 보전할 충분한 사명감과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재는 자리에서 그시대와 그지역의 삶을 반영해주기 때문에, 그 것을 대하는 맘속에는 역사가 함께 하여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 아닐까 생각해보며 길을 달린다. 여주를 지나며 고달사지를 떠올렸으나 이내 지워본다. 예전에는 강이 요즘의 고속도로 같은 역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탐사도 강을 따라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유역과 멀지 않은 이곳 절터들은 아마도 이시대에 교역의 중심에서 안전을 빌어주는 사찰들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오늘의 원주여행은 우연인지 사지만을 둘러보게 된다. 여행 마다 테마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여주 고달사지를 함께 넣는 다면  영서의 강원도의 화려했던 옛 절터 중 보물을 보유한 절터는 거의 다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저물어 가는 저녁 하늘이 오늘은 더 을씨년스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