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촉사를 나와 식사를 마친후 부여로 향한다. 다음 행선지가 정해져서 인지 네비게이션이 안내 하는데로 대조사로 향한다. 이번의 여행도 지난 족적을 회상하며 가는 길이지만, 매번 갈 때 마다 나의 여행은 더 다채롭고 많은 지식과 즐거움을 얻게 됨을 느낀다. 경치를 보고 자연을 즐기려면 4계절의 변화, 해뜨고 지는 하루의 변화, 오는 길 가는 길의 다름 등 그 때마다 감흥이 다름과 변화를 즐기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우리의 문화재는 변화보다 그 시대를 반영하는 그 자체의 온전한 존재의 보전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봐도 기억되는 그 자리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재 자체는 보존과 수리가 필요하기는 하나, 이즈음의 생각은 문화재는 그대로 인데 보호각이나 주변의 환경의 정비로 인해, 자연스러움과 옛스러움의 순수함이 살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고증을 거친 복원들이라 생각되고, 물론 과거에는 훨씬 번창하였지만 세월로 인해, 여러 환경으로 인해 쇠퇴하여졌으니 옛시절로 복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옛스러움과 정비에서 오는 사소한 차이라 할까.

이 사찰도 유래가 존재한다. 백제 성왕 10년에 세워진 대조사의 미륵불이 있는 자리에는 당시 큼직한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아래에는 오래전부터 한 노승이 작은 암자를 짓고 살고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이 날도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노승은 참선삼매경에 빠져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날따라 자꾸 졸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노승은 이래서야 될 말이냐 하고 자책을 하면서도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이때 노승은 꿈속에서 한 마리의 큰 새가 서쪽에서부터 이리로 향해 날아와 찬란한 황금빛을 발산하면서 살포시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노승이 사는 암자 뒤 큰 바위를 향해 계속 날개를 저었다. 그러자 햇빛에 반사된 한줄기 광명이 그 곳 바위에 집중되더니 놀랍게도 그곳에 미륵보살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에 노승은 깜짝 놀라 잠이 깨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노승은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는 것이었다. 노승은 그제야 예사 일이 아니라 하늘이 뭔가를 계시하는 현몽임을 깨달았다. 노승은 이 사실을 임천군의 성주에게 알렸다. 성주는 반신반의하며 산에 올라와 그 바위 앞에 다가갔다. 그러자 큼직한 바위 전체가 황금 덩어리인양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미륵보살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성주는 그만 그 자리에 엎드려 합장 예배를 올렸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성왕(聖王)은 적지 않게 감동했다. 성왕은 그 자리에 불력으로 국가안태와 수호를 비는 큰절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성왕은 많은 사공(寺工)을 동원하여 드디어 성왕(聖王)5년 4월 초파일 석가여래의 탄생일을 기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절의 창건불사는 국영으로 규모가 큰 공사였으므로 애당초 십년의 세월이 소요될 듯 하였으나 성왕(聖王)은 사공을 밤에도 투입하여 공사 진척을 서둘게 하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밤의 공사현장에 그 새가 날아와 황금빛으로 환희 밝혀줄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운 새소리로 인부들의 피로를 씻어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사는 성왕 10년 4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에 준공을 볼 수가 있었다. 실로 공사기간이 애당초 예측했던 10년의 절반인 5년으로 단축되었던 것이었다.


이날의 준공법회에는 성왕도 멀리 웅진에서 찾아와 참석하였다. 성대한 법회가 끝날 무렵이었다. 처음 황금새가 내려앉아 울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탑에서 한 마리의 큰 새가 나래치며 나타나더니 서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이었다. 이 신비스러운 일로 인해서 대조사란 이름을 갖게 된 이 절은, 그로부터 수백년간 웅진으로부터 소부리로 천도한 백제 수도를 지키는 가림산성의 영장으로서 존속하였으며 백제의 그 많은 성들이 18만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을 때도 끝끝내 적병을 접근시키지 아니하였던 신술을 발휘하였던 것이다.(문화유산 채널 인용)

대조사는 관촉사에 비해 당우도 적고 사찰도 규모는 적은 편이나 방문시 마다 무엇인가 조금식 변모하여 가는 느낌이다. 관촉사에 비하면 그리 많은 볼 거리도 없다. 하자만 이사찰도 한해 한해 커지는 사찰이 되기를 바라본다. 대조사 석탑은 석불과 같이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원래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1975년 부근에서 몸체돌을 발견하여 복원한다. 이지방의 다른 탑과달리 통일신라후 유행한 3층석탑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 형태로 보아도 신라탑 양식을 띄고 있다 .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의 하나로 논산에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이다. 머리 위에는 이중의 보개(寶蓋)를 얹은 네모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풍경이 달려있다. 관 밑으로는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머리모양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도 마찬가지이다.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며,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데 매우 투박한 모습이다. 팔의 윤곽은 몸통에 붙여 옷자락으로 겨우 표현되었고, 손도 간신히 나타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연꽃가지를 잡고 있다. 보살상 앞에는 제사 음식을 차려 놓기 위하여 판판한 돌을 마련해 놓았다. 전반적으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과 함께 동일한 지방양식을 보여주는 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지금 이사찰에서는 이불상을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 입상과 같이 국보로 승격되기를 바라고 있다. 보물이 지정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에 못지 않다는 일념으로 국보로 승격되기를 기원한다. 사실 개태사의 석조여래 삼존입상은 219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218호, 대조사는 217호 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당시 조선의 문화재 가운데 본존 가치가 있다고 선정한 것에 일련번호를 붙여 조선의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등을 지정하고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숭례문), 2호는 동대문(흥인지문) 식으로 번호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총독부에서 거리가 가까운 순으로 번호를 붙인 것으로 경성,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와 같은 순으로 부여하였다. 해방 이후 격동기를 거치면서 미처 문화재 관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여 방치되었다가 1955년 일련 번호는 그대로 둔 채 국보와 보물을 구분하였다. 국보와 보물의 일련 번호를 정비한 것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 재정 이후이다. 이 때부터 지금까지 일련번호가 유지 되고 있다. 문화재의 일련 번호는 가치의 우선 순위와 아무 관련이 없으나, 일각에서는 일제 시기 정해진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것에 반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해마다 문화재를 검토하고 보존 가치가 높은 것을 새롭게 국보로 등록하고 있다.국보는 1962년 12월 20일 보물은 1963년 1월 21일 지정 되었는데, 이때 제1호 흥인지문을 시작으로 386호 창경궁 옥천교까지 지정된다.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국보인데 대조사의 석조불은 왜 보물이냐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안목을 원망해본다.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여야 할까, 대조사는 1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 미륵부처님이 10m크기와 하나의 석불로 장엄함이 중생을 압도하고 있으며 온화한 미소와 붓다의 따스한 가슴이 대중에게 전해지는 살아숨쉬는 미륵불이다 라는 대조사 미륵불 국보 서명운동의 한 글귀를 인용하여 주지스님의 염원을 대변해본다. 많은 분이 방문하여 사찰이 날로 번창하고, 많은 이의 발길이 닿아 우리곁에 있는 문화재로 거듭나면 자연히 국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많은 사람의 서명운동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며, 그로 인해 더 관심을 가지고 보전에 힘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곳의 석불도,관촉사와 개태사의 석불도 많은 사람의 관심속에서 보전되며 미륵불의 역할을 해나가기를 바라본다. 웅장한 석불상들의 나름의 모습에 미륵불의 모습도 다양하다는 생각을 가지며 집으로 향한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