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충청남도

서산 보원사지

如一 2022. 1. 18. 13:58
如一同行 일곱번째 - 서산#!!#如一 유광하 기자등록 2021.04.28 16:07목록메일프린트스크랩글씨크기 크게글씨크기 작게

용현리의 마애여래 삼존불상을 친견하고 용현 자연 휴양림 방향으로 조금만 오르면 보원사지 터가 있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사진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 같은 넓은  광장같은 터에 보원사지가 자리한다. 보원사지는 백제시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대사찰이었다한다. 

 

이절터에 신라와 고려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던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며 1967년 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 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백제 , 신라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사적지이다.

 

이유물은 추후 중앙박물관에 갈기회가 있으면 올리기로 한다.

 

이곳에는 많은 유물이 존재한다.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 제 102호), 사찰에 행사시 불기나 괘불을 거는 당간지주 (보물 제 103 호), 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 석탑(보물 제 104호), 975년 (광종 26년)   법인 국사가 입적하자광종이 지시로 세운  보승탑 (보불 제 105호) 법인 구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탑비(보물제 106호)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는  사적 326호고 1987년 7월 18일 지정되었다.  현재는  사적 326호고 1987년 7월 18일 지정되었다. 

 

서산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절터입구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보물 제 102호 보원사지 석조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보물 제 103호 보원사지 당간지주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보물 제 104호 보원사지 오층석탑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보물 제 105 호 보원사지 법인 국사탑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 106호 보원사지 법인국사 탑비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개심사 이정표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서산에서 유명한 사찰인 개심사로 가는 길이 절터 뒷산으로 나있다. 

보원사도 고찰이 가능 하면 벌판에 산재한 보물에 맞게 새로이 사찰로 모습을 갖추어 규모 있게 복원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강댕이 미륵불

강댕이 미륵불은 현재의 고풍저수지 상단부 안에 있었던 것을 저수지를 축조 하면서 수몰되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저수지에서 사찰로 가는 진입로에서 얼마가지 않으면 길옆에 서있다. 조성 연대는 고려말~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216cm 어깨의 폭은 65cm 두께는 25cm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을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태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행하는 중국 사신등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裨補)장승이었다고도 한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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