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군위로 향한다. 오늘은 전국이 미세먼지가 많아 고속도로의 바깥풍경도 뿌옇다.
군위에 도착하니 이곳은 이동할 때의 공기 보다는 맑은 편이었다. 동남쪽으로 향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된다. 오늘은 군위에 있는 국보 보물을 담사할 예정이다. 군의는 무엇보다도 국보인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 불상이 유명하다.
군위를 들어가기 전 도로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멀지 않은 지보사로 향한다. 이곳은 보물 제 682호 지보사 삼층석탑과 경북 유형 문화재인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있다.
사찰의 입구에 넓은 주차장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키가 큰 커다란 은행나무와 3층석탑이 돌계단을 통해 올려다 본 사찰의 왼쪽에 서있다.


이사찰은 은혜사의 말사로 973년 창간되었으며, 이 당시 맷돌, 가마솥, 청동향로 등 세가지 보물을 지녀사(持寶寺)라 불렀다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대웅전과 2층 누각, 삼성전(三聖殿)·반야선원(般若禪院)·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지보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아담한 모습이다. 기단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구성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의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고, 기둥 사이에는 무늬를 새겼는데, 아래층에는 사자 모양의 동물상을, 위층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넣었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들이 모두 높아서 다소 우뚝해 보인다. 기단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별도의 판돌을 삽입하여 윗돌을 괴도록 하였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새겨두어 부처님을 모시는 방(감실)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별도의 돌을 얹어 구성한 것으로, 밑면에 새겨둔 4단의 받침이 두꺼워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많이 깎여나가고 훼손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느끼게 하지만, 조각 수법이 화려하고 외양이 단정한 고려 전기의 우수한 작품이다.

지보사의 대웅전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26호 석조 아미타여래삼존 좌상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 정토에 있는 부처인데, 이 부처를 염하면(아미타불) 죽은 뒤에 극락에 간다고 한다. 가운데 중심 불상과 좌우에는 중심 불상을 모시는 보살상이 있다. 불상들의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보면 숙종 12년(1686)에 승호파 상륜이 주도하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 책임자인 상륜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 경상도 일대에서 활발하게 조각 활동을 펼친 승호파의 가장 뛰어난 승려였다. 발원문에 불상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불상의 손 모양과 옷 모양으로 보아 중심 불상은 아미타불이고, 좌우 불상은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으로 추정한다. 불상이 만들어진 때와 조각승의 이름, 불상을 모신 장소 등이 있어, 조선 후기 불교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또한 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나다.

지보사를 떠나 팔공산의 국보를 찾아 부계면으로 향한다. 가는 길목에 부계면 한밤마을 돌담길 안의 대율사의 보믈 제 988호 군위 대율리 석조 여래 입상을 찾아 본다. 일전의 방문에는 사찰의 문이 굳게 닫쳐있어 문 틈 사이로 멀리서 보았으나, 이번에는 스님 덕분에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석조여래 입상은 이사찰 대율사 용화전 안에 모셔진 불상으로 둥근 대좌(臺座)위에 올라서 있으며 높이가 2.65m이다. 민머리 위에 있는 낮고 넓은 머리(육계), 둥근 얼굴, 아담한 눈과 입, 어깨까지 내려진 긴 귀 등에서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손끝이 위로 향하도록 펴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몸쪽으로 하여 가슴에 대고 있는 독특한 모양이다. 양 어깨에 걸쳐진 옷은 가슴과 배를 지나 무릎까지 얕은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팔목에 새겨진 옷주름은 곧게 서 있는 긴 하체와 함께 당당하지만 경직된 인상을 풍긴다. 다소 딱딱한 면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얼굴 등을 통해 세련되고 당당한 신라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곳 마을의 돌담길을 걷는 것은 지난번 방문때 경험해 보았고 불상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기쁨으로 서둘러 국보를 향한다 . 요즘은 해가 길기는 하지만 석굴암 안의 촬영이 가능할지 염려하며 양산 서원 앞에 주차하고 사찰로 향한다.

국보 제 109호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軍威阿彌陀如來三尊石窟)은 1962년 9월 22일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상으로부터 약 6미터 높이의 천연적인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 높이는 4.25m, 본존상은 2.18m, 우협시보살상은 1.92m, 좌협시보살상은 1.8m.이다. 거대한 자연 암벽을 뚫어 석굴을 만들었는데, 입구는 원형에 가깝고 내부 평면은 방형(方形)이며 천장은 궁륭형(穹窿形)을 이루었다. 독립된 삼존석상을 석굴 내부 벽면에 붙여서 안치하였다.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보다 연대가 100여년 앞선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들어진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사각형의 대좌(臺座) 위에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몸에 비하여 큰 편으로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 대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은 얇게 걸치고 있어서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옷자락은 넓은 무릎을 거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좌우의 보살상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다. 가슴 앞에는 목걸이를 걸치고 팔에는 팔찌를 끼고 있으며, 옷은 길게 U자형의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고 있다. 이들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신체 비례와 목·허리·다리 3부분을 비틀고 있는 모습에서 새롭게 수용된 중국 당나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문화재보호를 위해 접근을 통재하여 불단이 마련된 아래의 정면에서 볼 수가 있다. 석굴이 존재하는 주변에 군위 삼존석굴 석조 비로자나불상(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 258호),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1호)가 있다.

군위 삼존석굴 석조 비로자나불상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 258호)는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없어진 상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은 펑퍼짐하게 표현하였다.볼에 살이 올라 풍만한 얼굴은 길게 늘어진 두 귀와 함께 양감을 느끼게 한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는데 앞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1호)은 1층 기단(基壇) 위에 1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특이한 형태로, 전탑(塼塔:흙벽돌로 쌓아만든 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기단은 네 면마다 모서리에 2기, 그리고 그 사이에 3기 등 5기씩의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20여 단의 일정치 않은 돌을 포개어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전탑에서와 같이 아래·윗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는데,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에도 다시 여러 단의 층단을 쌓아 점차 줄어들게 하였다. 지붕돌 한가운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탑신을 다시 쌓으면서 본래의 모습은 잃었으나 비교적 탑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각 부분의 모습에서 양감을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보아 9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이 있는 경사진 바위는 계곡으로 가파르게 떨어져 사람의 내왕이 없었으리라 생각이 들지만 어떻게 통일 신라초기의 석굴이 최근에서야 발견되는지 믿기지 않았다. 이토록 깊은 골의 바위절벽의 중간을 파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시려 했던 옛사람들의 불심은 어떠했는지, 이러한 석굴을 만들때 어디서 영감을 받아 이토록 놀라운 유산을 남겼는지 궁금증과 놀라움을 가지고, 미세먼지가 가시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향한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