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서서 부여의 무량사를 찾아본다. 그간의 방문에 비해 여행기를 남기지 못한 사찰 중에 하나라 생각되어 발길을 옮겨 본다. 무량사는 통일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만수산 기숡에 자리잡고 있다. 잘 정리된 주차장을 나서서 사찰로 향한다. 만수산 무량사임을 알리는 홀연히 자리한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다하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일주문]
무량사는 고려시대에는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등의 불전과 30여동의 요사와 12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무량사 구지]
일주문에서 정면으로 향하는 곳에는 무량사 옛 절터를 나타내는 무량사 구지가 자리한다. 지금은 잘 정비된 구지를 통하여 이전의 가람의 모습을 짐작 할 수는 없으나, 대략 2천평의 면적 전구역에서 다량의 기와 조각이 산포되어 있고, 화강암제 기단석열과 3단 석축으로 정교하게 쌓은 담장지로 미루어 건물지로 추정하며, 발견되는 막새의 수준이나 각종 청자류로 보아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량사 당간지주]
일주문을 지나 왼쪽으로 약간의 비탈을 오르다 보면 천왕문 동쪽 앞에 당간지주가 자리한다. 두 개의 길다란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는데, 기둥 끝은 둥글게 다듬었고,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 된 띄를 새겼다.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의 고정을 위한 2개의 구멍이 있고, 그 중앙에 당간을 받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은 당간받침돌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제작 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천왕문]
사찰에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한 사천왕이 자리하는 천왕문을 지나면 사찰로 들어서게 된다.
[앞마다의 전경]
웅장한 이층전각과 탑, 석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3가지의 보물이 한컷에 담긴다.
[보물제 233호 부여 무량사 석등 ]
기둥이 8각인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받침돌은 연꽃 8잎이, 가운데 받침은 기둥 세우고, 그 위로 연꽃문양의 윗받침돌이 놓여 있다. 화사석은 8면 중 4면은 넓고, 4면은 좁은 형태로, 넓은 4면에 창이 뚫려 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치켜올림으로, 꼭대기에는 보주장식이 있다.
아래·위받침돌의 연꽃조각이 통일신라 전성기의 화려한 연꽃무늬와는 차이가 있고, 다소 형식적인 듯하다.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 185호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무량사 극락전 앞의 5층 석탑으로,기단(基壇)은 1단으로, 둥글게 다듬은 층단으로 괴임을 만들고,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다. 몸돌이 지붕돌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편으로 비례를 보이고 있어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과 밑의 받침은 딴 돌로 구성되고, 받침의 수는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든다. 탑 꼭대기는 낮은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킨 고려 전기의 탑에 의미가 깊다고 한다. 백제의 옛 땅인 지리적 특성으로 백제의 기법에 통일신라의 시대적인 양식도 계승되었다고 본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오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 5층 석탑 출토 유물 들] 문화제청 자료
[보물 제 365호 부여 무량사 극락전]
탑의 뒤편에 2층 구조로 위용을 과시하는 극락전이 자리한다. 그리 흔치 않는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건물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는 아래·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기둥 사이를 나누어 놓았는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벽면에 빛을 받아들이는 창문이 있는 구조였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으로 막아놓았다고 한다.
[극락전 옆면]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이 불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수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 삼존불이 자리한다.
[보물 1565호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 여래 삼존 좌상]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극락전의 주존불로,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삼존상은 아미타·관음·대세지라는 분명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고,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玄眞)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의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거대한 규모로 불신의 전체적인 모습이 도식적으로 단순화된 감이 있으나, 양대 전란 이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한 노력을 옅 볼 수 있다. 17세기 전반기 대형불상은 삼신 또는 삼세불상이 결합된 삼존형식이 대부분인데 이는 극락전의 주존으로 아미타·관음·대세지보살이 결합한 삼존도상의 드문 예로서 가치가 크다고 한다.
웅대한 전각과 불상과 어을리게 불상뒤에 자리한 후불탱화도 눈길을 끈다. 극락전 아미타삼존불 후불벽에 걸린 3폭은 1747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각각 독립된 폭으로, 현존 실내 봉안 불화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중앙의 아미타불화는 아미타불을 화면 가득히 크게 묘사하고, 지장과 미륵보살, 문수와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상단에는 두 벽지불(壁支佛)이 자리잡고 있다.
[보물 제 1860호 부여 무량사 삼존패]
삼존패는 1654년에 철학, 천승, 도균이 제작한 것으로 “이층전단청필후이겸비삼전패(二層殿丹靑畢後而兼備三殿牌)이층전 단청을 마친 후 삼전패를 겸비하였다” 라는 묵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왕실의 안녕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조선 17세기 불교 목공예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한 제작 연대와 제작 장인들을 알려주는 묵서명이 있는 점과 규모가 큰 점 등에서 의의가 있고, 구조와 도상, 기술적, 조성기의 사료적 가치 등 현존하는 삼전패 중 가장 뛰어나고 한다.
[무량사 명부전]
부여 무량사 명부전에는 중앙 불단 위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측면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의 삼존상이 있고 시왕이 각각 좌우에 5왕씩 대칭으로 모셔져 있다. 그 옆으로 판관(判官)과 사자(使者), 인왕(仁王) 등이 있다. 색채가 화려하고 옷에 새겨진 문양 등이 섬세하며 각기 17∼18세기에 유행했던 시대적 조각양식과 조선후기에 성행했던 명부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부전의 모든 존상들을 잘 갖추고 있다. 무량사 명부전은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눈으로 확인이 어려운 괘불탱이 무량사에 보물로 지정 보관되어 있다.
[보물 1265호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탱] 1997년 08 지정
미래불인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여덟구씩의 화불을 그린 괘불로 미륵불은 두 손으로 용화수 나뭇가지를 받쳐들고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서 있다. 보관의 끝에는 6구의 불상이 있고 그 사이로는 동자와 동녀 등 59구의 얼굴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그려진 이 불화는 5단의 화면을 이어 한 화면을 만든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보물 제 1479호 김시습 초상]
좌안 7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밀화형의 끈이 달린 평량자형의 맆을 쓰고 담홍색 포를 입고 있으며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과 의복은 옅은 살구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색상의 미묘하고 절제된 조화로 묘사되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라는 인물사적 가치와 조선시대 야복 초상화의 가작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사찰을 오르는 길에 왼쪽 기슭에 자리한 부도 터를 내려오며 들르리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니 그곳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가 자리한다.
[무량사 김시습 부도]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한번쯤 들어 봄직한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분으로, 21세 때에 수양대군(후의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불교에 입문하여 말년을 무량사에서 보내다 입적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부도로 조각이 매우 우수하고 화려하다. 일제시대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는데 그 때 밑에서 사리 1점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일주문]
사찰을 둘러보며 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깔금한 구조와 형태 그리고 웅장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볼거리와 격려를 받으며 조용히 경내를 둘러보는 기쁨도 맞 보았다. 돌아 나오는 길에 현판의 글귀를 보니 광명문이라 적혀 있다. 뜻을 헤아려 본다. 이 사찰은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모신 절이어선지, 사찰을 방문하면 밝은 미래나 희망을 의미하는 광명을 맞으라고 축원하는 듯 하다. 믿어보기로 한다. 현판의 글귀를 통해 새로운 각오와 활기를 얻어 귀가길과 내일의 생활을 그려보며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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