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괘정에서 약 150 미터 정도 이동하면 임리정이 있다. 스승의 곁에 머물고 싶어서 라는 예전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그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죽림 서원]
[죽림서원]
전망대를 나와 임리정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죽림 서원이다.
이 서원은 인조4년 창건으로 옛 논산의 지명이 황산이었기에 황산서원이라 하였다가, 현종 5년 에 죽림서원의 사액을 받는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 철폐되었다가 1946년 제단을 설치하고, 1965년 사우를 복원한다. 송시열이 쓴 '죽림서원 묘정비'에 의하면 황산의 위치가 호서와 호남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 곳에 서원이 들어섰다고 한다. 사우에는 죽림사라는 현판이, 사당 앞 좌우에는 공적비, 중건비가 있다. 제향인물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등 6인을 제향하여 육현 서원으로도 불렸다 한다.
[임리정 정면]
임리정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보여 주는 건축물이다. 조선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황산정이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증자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다. 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뒤쪽으로는 사랑방을 2개 꾸며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임리정 후면]
[임리정의 측면]
[임리정 후면, 앞쪽이 금강]
[임리정기비]
앞마당의 '임리정기비'는 김사영이 글을 짓고, 김영목이 써서 1875년(고종 12년)에 세운 것이다. 비에 남긴 글을 읽고 기리기는 지식이 짧아 엄두가 나지 않아 참아본다. 임리정과 죽림서원의 창건에 대하여 적은 글이라 한다는 것으로 만족해본다.
오늘의 목적지인 익산으로 향하다. 찾아본 두 누정을 보며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심, 후학을 가르키기 위한 노력,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정자를 짓고, 책을 읽고 세속의 삶을 지켜보며 생활한 선비의 삶을 옅보게 된다.
눈 호강하고 충청에서 많은 흔적을 볼 수 있는 송시열을 궁금해 하며 논산을 벗어나 익산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