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 혼불 문학관, 신계리 마애석불
오늘은 남원 신계리의 마애석불조상을 찾아가는 길이다. 길을 조금 벗어나 혼불 문학관을 찾아본다. 나는 읽어 보지 못한 소설이나 동행자가 통독으로 어렴푼한 기억 속에 들려 준 줄거리를 들으며 들러 본 것이 기억나서 추억을 얹고, 바뀐 모습을 궁금해 하며 찾아본다. 가는 길의 서도역에서 들러 기차길에 대한 많은 기억을 덮어 씌워 본다. 소설에 장소이기도 하지만, 실제 많은 사연을 않고 있었을 역이라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 본다. 기차길 위애 서서 중심 잡기 하며 걸어도 보고, 기차길에 설치 된 의자에도 앉아 본다. 깔금하게 정비 된 서도역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차길도 작은 역도 이제는 문화재 자료로 자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서도역]
서도역에서 길을 나서 철길 건너를 달리면 혼불 문학관에 당도한다. 주차장에서 멋지게 단장한 언덕 길을 오르면 넓은 마당에 자리한 두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혼불문학관의 전시관과 교육관]
한옥 타입으로 잘 지어진 전시관과 교육관은 혼불의 소설에 관한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잘 지어진 박물관이 문학과 건축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전시관내 작가의 집무실 전경]
작가 최명희 님의 약력과 17년의 창작의 노고,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혼불은 작가가 17년의 새월 혼신을 바쳐 쓴 대하소설로, 일제강점기 사매면 매안 마을의 이씨 집안 종부 3대의 며느리와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선조의 숨결과 손길, 염원과 애증을 우리 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복원하여 형상화한 소설이라 한다. 창작을 위한 노력을 문학관을 통하여 느껴본다.
길을 나서서 보고자 하던 마애불상을 찾아간다. 순천 완주 고속도로 밑을 지나서 산밑으로 접어들어 임도길을 조금 들어서면 산으로 오르는 길에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산성을 쌓듯 단을 만든 위에 마애불의 모습이 보인다.
산길을 산책 삼아 조금 오르다 보니 돌단 위에서 머리만 내밀며 찾아온 것을 반겨주고 계시는 듯하다.
보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이곳을 일부러 찾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친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을 찾은 것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낀다.
[보믈 제 423호 남원 신계리 마애석불 좌상]
원래 이곳에 자리했을 듯한 바위였다 짐작하지만, 굳이 이 곳에 와서 불사를 이룬 이유에 의문이 생긴다. 머물러 작업해야 할 날도 적지 않을 텐데, 의문 만 가득한데,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로 위문을 멈춘다. 하루 만에 만드셨다기엔, 거대한 바위를 몸체 뒤의 광배로 삼고, 자연 암반을 대좌(臺座)로 삼은 마애불은 3m도 넘어 보이고 도드라짐의 볼륨감이 부피감이 풍부하다.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보믈 제 423호 남원 신계리 마애석불 좌상]
풍악산에 바위의 남면을 안쪽으로 깍아내며 하나의 바위에 불상과 광배가 새겨진 3.4 m의 불상이다. 대좌는 자연 그 자체를 대좌로 삼기 위한 듯 따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민머리 위에 육계가 유난히 크며, 삼도가 있고, 의상은 편단우견 형식의 법의를 새기고 나머지 부분은 선각 기법으로 표현괴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추정하는데, 자세에서 땅을 가리키던 오른손을 지금 막 배 앞으로 들어 올린 듯한데, 그 의미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비정형화된 수인은 고려시대 전기 불상에서 다양하게 보인다고 한다. 구슬처럼 둥글게 표현한 머리광배는 예가 별로 없는 특이한 것으로 주목 받는다고 한다. 양감이 풍부한 얼굴 표현 등은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지만, 풍만한 신체에 비하여 각 부분의 세부표현이 간략화된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여겨진다고 한다.